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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화와는 다르게 우리 전통적인 한국화들의 분위기와 느낌은 확연히 다릅니다. 서양화와는 다르게 전해지는 한국화들의 유물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보존과 계승도 자연 본래의 환경 그대로를 이용해 왔기 때문에 대부분 파손되거나 유실되었습니다.

   특히 개인 유품의 형태로 전해지던 초상 그림과 같은 한국화들은, 그 문중에서 특별히 기탁하여 내놓지 않는 한, 더더욱 구경조차 해 보기도 어렵습니다. 보존의 어려움으로 인해 몇몇 박물관에 기탁된 국보급 몇 점을 제외하면 우리 고유의 섬세하고 깊이 있는 초상 그림들을 감상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 없습니다.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지요.

   그런데 지난 9월 말에 성주(星州) 이씨 문중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초상화 27점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하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고려 문신 이조년(李兆年, 1269년-1343년)의 초상화도 함께 공개가 되었습니다. 무척 반가운 일이며, 매우 독특한 느낌의 그림입니다.  

   우리 그림으로 그 동안, 신사임당의 마당 안 풀과 벌레를 주제로 정물화를 그려 넣은
병풍 그림을 비롯하여 이암의 강아지와 고양이, 새를 주제로 한 익살스런 동물 그림과 정조의 파초와 국화 그림, 안견의 소상팔경도, 그리고 이중섭의 새해맞이 소 그림들을 감상했습니다. 이 외에 매우 독특하고 언뜻 보기에도 인상적인 이조년의 초상화를 이 기회에 함께 감상해 보려고 합니다.

   고려말 조선초의 사회 역사와 시대 변화를 반영한 초상화

   
위키백과에 의하면,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활동했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이조년의 자는 원로요, 호는 매운당(梅雲堂)이며, 본관은 성주입니다. 고려 후기 충렬왕과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까지 4대에 걸쳐 왕을 보필한 문신입니다.

   이조년은 고려 원종 10년인 1269년에 성주에서 태어났으며, 충렬왕때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학업 능력이 뛰어났고, 도량이 넓었으며, 1340년인 충혜왕 때, 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성산군에 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원나라와의 관계와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유배되었으며, 고향에서 13년간 은거하기도 하였습니다. 충혜왕 때 성산군(星山君)을 지내다 고향에서 말년을 보냅니다. 그는 시문(詩文)에도 뛰어난 문장가였는데, 아래와 같이 그의 유명한 시조 한 수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
一枝) 춘심(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배꽃에 달이 밝게 비치고 밤은 깊어 삼경인 때에
     나뭇가지에 깃들여 있는 봄의 정서를 소쩍새야 알 리가 있으랴마는
     다정한 것이 병처럼 되어서 잠을 못 들고 있노라.



   이 시조는 한역시(漢譯詩) 형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위(申緯)의 '경수당전고, 소악부(小樂府)'에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다정가(多情歌)'라고도 불리는 이 시는, 그 번역한 시어들을 보면, 초야에 뭍혀 사는 시인의 현실과 심리 묘사, 그리고 은유적인 형상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걸작이라고 감히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梨花月白三更天 (이화월백삼경천)
     啼血聲聲怨杜鵑 (제혈성성원두견)
   覺多情原是病 (진각다정원시병)
     不關人事不成眠 (불관인사불성면)


   하얗게 핀 배꽃에 달은 환히 비치고 은하수는 돌아서 자정을 알리는 때에,
   배꽃 한 가지에 어린 봄날의 정서를 자규가 알고 저리 우는 것일까마는
   다정 다감(多情多感)한 나는 그것이 병인 양, 잠을 이루지 못하여 하노라.



   봄 밤의 애절한 마음과 감상이 잘 표현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조년이 충혜왕의 잘못과 정치를 비판하고 충언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에 내려와 있는 상황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애절한 심정과 하소연이 잘 드러난 시이며, 충혜왕에 대한 충정이 잘 반영된 작품입니다.

 

              ▲  이조년의 이모본 초상 그림, 1825,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제공


   이제 위 이조년을 그린 초상그림을 살펴 봅니다. 우선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그의 강직한 품성과 신하로서 충직한 직언을 하였을 당시의 올곧은 표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흰 머리와 흰 수염으로 볼 때, 고향에 내려와 있던 말년의 모습으로, 위 시를 읊던 때의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눈동자와 꼭 다문 입술, 다부지게 쥔 손, 의자 팔걸이에 올린 팔꿈치, 당당한 어깨선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합니다. 마치 방금이라도 그림에서 일어나 내게로 걸어 나올 듯, 매우 사실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림을 감상하는 독자나 관객과 마주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살아 있는 듯 강직한 품성이 잘 드러난 이모작 초상화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초상 그림에 얽힌 사연에 있습니다. 위 그림은, 직접 그린 화가는 알려져 있지 않아 안타깝지만, 본래 이조년의 초상 원작을 본떠서 복사하 듯 그린 1825년의 이모작(移模作)입니다. 주먹을 쥔 듯한 왼손도 사연이 있는데, 본래는 염주가 들려 있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이 초상 그림은, 이조년의 후손인 성주 이씨 문중에서 전해 내려온 초상화 27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초상화들의 주인공들은, 이조년의 아버지인 이장경(1214-?)을 포함하여 이조년(李兆年.1269-1343), 이승경(李承慶.?-1360), 이포(李褒.?-1373), 이직(李稷.1362-1431), 이제(李濟.?-1398), 이욱(李稶.1562-?) 등 모두 14명입니다.

   문중 사당에 봉안(奉安, 신주나 초상화를 받들어 모시는 일)되었던 것이며, 경북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된 유산이기도 합니다. 고려조에서 조선 초기까지 공신(功臣)으로 책봉된 인물들을 그린 것입니다. 이장경의 이모본이 4점으로 가장 많고, 그 외 대부분은 2-3점이 남아 있습니다.

   위 그림도 원본은 아니며, 세월 따라 삭거나 썩어 부서지는 종이 그림을, 30-80년 간격으로 수십년마다 성주 이씨 후손들이 베껴서 그리는 방식으로 보존한 초상화입니다. 현재 1655년의 첫 이모본과 원본은 모두 유실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후 몇 십에서 몇 백년 단위로 남긴 다른 이모본의 상당수가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조년이 사망한 200년 쯤 뒤의 일입니다. 성주목사 노경린(1515-1568)이 영봉서원을 세워 생전에 학덕이 있던 이조년
의 신주를 모시는 배향(配享)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율곡 이이(1536-1584)가, 영당(靈堂, 덕이 높은 사람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 지은 집이나 사당)에 모셔진 이조년의 모습이 원나라 복장에 염주를 들고 있어 호불()하고 불교적이라는 이유로 반대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이 그림처럼, 모본(模本)의 형태를 정확하게 옮겨야 하는 원칙에서 벗어나서, 복장을 변화시키고 염주를 지움으로써, 어색한 왼손이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동안의 원작(원본, 모본)에 대한 이모(移模)의 관행과 초상의 양식이 변화한 과정과 방식을 보여주는 실제의 자료이기도 하며, 이모본에 얽힌 재미있는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불어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이모작을 그린 시기인 19세기의 특징과 당시의 화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즉 19세기의 이모본들이 보여주는 특징으로, 이 그림도 강렬한 색채의 붉은 채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교를 상징하는 염주는 삭제했지만, 원나라 양식의 둥근 모자는 그대로 살려 두었습니다.

     인간존중의 사회 통념이 잘 드러나 있는 족보(族譜)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당시의 이모본을 고려해 볼 때, 고려시대의 모본이 조선초기의 사회 분위기와 만나 적절하고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절충(折衷)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당시의 고려말의 시대적 상황과 조선초의 억불숭유(抑佛崇儒)라는 사회 분위기와 변화의 역사가 그대로 기록된 미술사와 자료로서의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척 흥미로운 또 한가지의 사실이, 위 초상화와 함께 기탁된 목판과 17세기에 처음 간행된 '성주 이씨의 족보'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조년의 아버지인 이장경은 5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고 있습니다.

   이 족보에 기록된 자손들이 기록된 순서를 보면, 제일 먼저 큰 아들 이백년(李百年)이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에 딸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둘째 아들 이천년(李天年)이, 셋째 아들 이만년(李萬年), 넷째 아들 이억년(李億年), 다섯째 아들이자 막내 이조년(李兆年)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성주 이씨 족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제공

   각각 아들들의 이름도 재미있지만, 이처럼 폐쇠적인 조선시대보다도 훨씬 더 개방적인 가족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또 고려 말에는 사위를 아들보다 먼저 기록하거나, 외손의 외손까지 기록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혜령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에 의하면, "고려 시대까지는 부계적인 친속관계가 아니라, 양쪽 친적의 친속관계가 폭넓고 긴밀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씨족의 족보에서 특정 기간에 부자, 부부 등 여러 사람이 동시에 사망하는 경우가 지역과 시기에 차이를 두고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대 의학이 등장하기 전인 조선 시대에 전염병의 발생과 이동 경로, 그 역학구조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을 찾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만의 독창적인 족보와 씨족의 역사가 그러한 자료들을 풍부하게 전해 줍니다.  과거 본관이 거주지와 겹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염병의 분포와 확산 경로를 족보 연구를 통해 알아낼 수도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 연구원에 따르면, "특히 이모본 제작은 조상의 얼을 후대에 남긴다는 의미였다"며 그 의미를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문중에 소식을 알리고 돈을 모았던 이모본 제작 과정은, 집안의 큰 행사이자 가문의 구성원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그 의의를 밝혔습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문중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이모본 초상그림과 족보와 같은 유물은 개인 친족 가문에 대한 역사와 기록이기도 합니다. 이에 더하여, 좁게는 지방과 넓게는 사회와 국가의 역사 연구에 필요한 귀중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와 의미도 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Posted by 초하(初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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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야.. 정말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으싶니다.
    전 그냥 보기에 좋으면 아~ 좋구나~ 이런정도 인데..^^;

    • ㅎㅎ 김군님의 예술에 대한 혜안과 식견을 익히 알고 있는데, ㅎㅎ 왜 이러십니까 ?
      저도 이 좋은 기회에 운좋게 그림 감상하며, 찾아 알아 보고 정리한 것입니다. 도움이 되었을까요 ? :)

  2. 몽유도원도 보러는 아니지만...
    어제 잠시 중앙박물관에 갔었는데...
    초상화들이 꽤나 있더군요.
    그 초상화들과는 다른 느낌이랄까요 ^^
    어제껀 조선시대꺼니 ^^;;

    • ㅎㅎㅎ 드뎌 관람을 하신 게로군요...

      여러 시대상과 사회변화를 고려해 볼 때, 조선의 인간 존엄 사상과 철학은 고려에 비해 퇴보한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 모습이 초상화에도 반영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ㅎㅎㅎ

  3. 이조년 형제들 이름이 독특하군요.
    재밌어요.

  4. 최고로 좋은 전통한지에 그려서 잘 보관을 했으면
    한1,000년 정도는 가지 않을까 싶은데..조금 안타깝지요..^^
    그림 수명이 다해 다시 베껴서 그리는 후손들의 마음이
    참 따뜻하고 보기 좋은것 같습니다.
    이모작도 시간이 지나고 보존이 잘 되어있으면 가치가 있겠지요.

    한가위 잘 보내셨지요..^*^

    • 요술배님 말씀처럼 참 안타까운 부분의 우리 역사들이 적지 않지요... ㅎㅎ

      그러게요. 고려시대에도 그런 한지가 있었다면, 훨씬 원본에 가까운 그림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죠... 음. 그죠, 이모작을 그려 보존하던 문중 후손들의 정신과 그런 가문의 열정에 저도 감동을 받았답니다.

      요술배님 덕분에 저도 한가위를 정말 한가롭게 잘 지냈습니다.

  5. 고려때는 조선과 좀 다른 것 같아요. 초상화가 손이 보이네여? 그런데 이게 더 박력있어 보여 좋네요.

  6. 아 정말 오랜만에 읽어본 다정가 였습니다
    예전에 저 글귀를 한자로 외우려고 노력했던 까까머리 그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좋은 글귀로 인해 잠시나마 옛추억의 미소를 머금어 봅니다..^^

    • ㅎㅎ 그죠. 피아노님도 참 좋아하는 시로군요. :)
      시로만 알려졌던 그의 모습을 알게 되고, 기억 속에서 연결할 수 있게 되어, 저 역시 참 즐거운 감상이었답니다. ^&^

  7. 연구하는 분들에게 기탁되어 더 알려지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나중에 박물관으로 가서 전시로 까지 이어졌으면 하네요.

    • adish 님, 반가워요~~
      개인 소장품이나 문중의 유물이 아닌, 국민 모두의 재산으로 감상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반길 일이지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기탁품에 대한 의미를 살피는 학술대회를 연다고 하니, 아마 일반 공개나 전시도 가능할 겁니다. ^&^

      보존이 어려우면 박물관으로의 이관도 가능하겠지요!

  8. 요즘은 제 삼자를 말할때 다정한 사람이야~ 하고 말하지 난 다정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면 돌맞겠죠? ㅋㅋ 옛적 말투라 더 다정다감하네요^^ 초상화에는 뭔가 어느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을 당당함이 깃들어 있는거 같아요^^

  9. 초하님 블로그를 통해 이조년 조상님의 초상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블로그 잘 보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