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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춥고 지루했던 기나긴 겨울이 지나갔습니다. 겨울잠을 자던 벌레나 개구리가 깨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경칩(驚蟄)을 지나 춘분(春分)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새해가 되는 것은 달력에서 날짜가 바뀌는 것을 보고 알게 되지만, 일상의 새해는 봄을 느끼면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 봄을 체감할까요?

   3월이 봄비가 지나가더니 꽃샘추위다, 잎샘추위다, 황사다 하여 몸을 움츠리게 하는 추위는 쉽사리 물러가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들이나 산자락에 핀 들꽃들을 보면, 확연히 봄을 느낍니다. ‘봄’ 하면 연상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초록으로 단장한 풀밭은 봄을 부르는 전령사가 아닐가 싶습니다.


   ▲ 고흐(Vincent Van Gogh, 네덜란드, 1853~1890), 꽃 핀 목초지(Pasture in Bloom), 1887, Kroller-Muller Museum, Netherlands



   온갖 인스턴트 식품에 익숙해진 요즘에는 그 이름조차 생소하겠지만,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란 세대는 들녘의 풀밭에서 자라는 이름 모를 수많은 풀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은 그런 풀 이야기들과 관련한 우리말들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내용은 '위키백과''표준국어대사전', "김지형의 국어마당", "국립 국어원", 그리고 "우리말 사랑" 글을 참고, 종합하여 정리한 것이므로, 더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참조하길 바랍니다.

     '풀' 이름들과 관련한 순박하고 아름다운 우리말

1. 삘기 : 어릴 적 잊을 수 없는 감각으로, 한 풀의 달짝쌉소름한 맛이 있습니다. ‘삘기’는 풀의 일종인 ‘띠’의 애순(어린 순)을 말하며, ‘삐비, 삐미, 필기’ 등의 많은 사투리로도 불리는 ‘삘기’는 봄의 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생풀을 먹을까 의아해 할 수 있겠지만, 먹을 것이 귀하기도 했던 그 시절에는 이런 것도 참 신기하고 훌륭한 간식거리가 되었습니다.


2. 김 :  풀이 풀밭이 아닌 곡식이 자리는 논밭에 있다면, 이를 ‘김’이라고 따로 부르며, 잡초가 되어 뽑히고 맙니다. 원래 ‘기음’이라고 불렀던 ‘김’은 논밭에 난 잡풀을 말합니다.

3. 깃 : 이 '김'이란 말은 ‘깃’과 말뿌리가 같은데, ‘깃’은 외양간, 마구간, 닭의 둥우리 따위의 바닥에 까는 짚이나 마른 풀을 말합니다. 부시(불이 일어나게 하는 조각)를 칠 때 불똥이 박혀서 불이 붙는 것을 ‘부싯깃’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도 ‘깃’이란 낱말이 들어 있습니다.

4. 푸새 : 이런 잡풀을 뽑아내는 것을 ‘김을 매다’라고도 하지만 ‘푸새를 다듬다’라고도 합니다. ‘푸새’는 산이나 들에 저절로 자란 풀을 두루 가리키는 말입니다.


5. 꼴 : 말이나 소에게 먹이려고 풀을 베었다면 그것은 따로 ‘꼴’이라고 부릅니다. 어린 시절, ‘꼴망태’를 걸머지고 걷던 시골길의 추억이 있는 사람들도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노첨지네 머슴이 꼴을 한 바소구리 지고 들어오다가 이것을 보고 얼른 등에 진 꼴짐을 지게째 박아버리고 손에 든 지겟작대기로 그 사람의 골통을 내리치니 그 사람이 작대기를 받아잡고 앞으로 채뜨려서 머슴은 작대기를 놓고 맨주먹으로 대어들고 노첨지의 아들은 어느 틈에 도끼를 찾아들고 다시 대어들었다.<1932, 홍명희, 임꺽정>  

6. 푿소 : ‘꼴’이나 생풀만 먹은 소는 힘이 약하고 비실비실해서 제몫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소를 ‘푿소’라고 하는데 ‘푿’은 ‘풀’이 변한 말입니다.

7. 여물 : 이러니 농사에 유용하게 소를 부리기 위해서는 잘 먹여야 하는데, ‘꼴’을 말려서 짚이나 꽁깍지 등의 갖가지 곡물을 섞어 쑤어 먹이는 것을 소의 밥을 ‘여물’이라고 합니다.

8. 먹이풀 :
꼴이나 여물로 쓰이는 풀을 ‘먹이풀’이라고 하며, 이 먹이풀을 장만하는 것도 큰 농사였습니다. 영화 '워낭 소리'에서 할아버지께서 아픈 다리를 이끌고 소를 위한 먹이 풀을 장만하던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구구거리며 마당가를 외오 돌던 장닭이 홰를 치며 날아올랐고, 옹옹. 목이 찢어져라 매암이가 울어대는 참죽나무 밑에서 토욕질하던 누렁이가 여리게 짖어대는데, 어석소가 여물 씹는 우릿간 뒤쪽 토끼장 위로 떨어지는 것은 땡감이다. - 김성동, <꿈>

9. 거름풀 :  
농사를 지을 때 거름으로 쓰이는 풀을 ‘거름풀’이라고 합니다.

10. 갈풀 : 논에 거름을 주기 위해서 풀을 베었다면 그것을 따로 ‘갈풀’이라고 부릅니다. 보리를 갈 때 거름하는 풀은 ‘보리풀’이요, 못자리를 만들 때 거름으로 넣는 풀은 ‘모풀’이라고 구별하여 부릅니다.

11. 괭이밥 : 괭이밥과, 괭이밥속속한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들이나 길섶, 집의 뒷 뜰 등에서 절로 자라지만, 간혹 들꽃(야생화)처럼 화분 등에 옮겨 키우기도 합니다. 5~8월에 피는 꽃은 잎겨드랑이에서 곧고 길게 나온 꽃자루에 산형꽃차례로 달리는데, 지름 8mm 정도로 작고 노랗습니다.

   네잎클로버와도 모양은 비슷하지만, 다른 식물입니다. 잎과 줄기는 시큼한 맛이 나는데, 부전나비먹이식물로, 어릴 적 먹어보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에 풀과 관련된 우리말 속담도 몇 가지 소개합니다. 

                                               ▲ Johann Georg Sturm (Painter, Jacob Sturm), 괭이밥

12. 풀 끝에 앉은 새 몸이라. : 매우 불안한 처지에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13. 풀 베기 싫어하는 놈이 단 수만 센다. :
일하기는 싫어하면서 그 성과만을 바람을 비꼬는 말입니다.

14. 꼴을 베어 신을 삼겠다. :
은혜를 잊지 아니하고 갚겠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15.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고, 소의 크기는 꼴 베 오는 등짐 수에 따라 다르다. :
노력 없이 결실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16. 여물 많이 먹은 소는 똥 눌 때 알아본다. :
남모르게 감쪽같이 한 일이라도 저지른 죄는 세상에 드러나고야 만다는 말입니다.

17. 여물 안 먹고 잘 걷는 말 :
현실과는 상반되는 희망적인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
고흐(Vincent Van Gogh, 네덜란드, 1853~1890), 흰 옷 입은 처녀(Girl in White), 1890. Oil on canvas.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이처럼 ‘풀’은 잡초로 천대를 받기도 하지만, 먹을 수 있었던 그 풀 맛을 기억하는 저와 같은 세대들에게는 또 하나의 감성적인 추억이기도 합니다. 특히 위에 소개한 ‘삘기’ 외에도 괭이밥의 맛과 누가 많이 꼴을 베어오나로 내기를 하던 ‘풀싸움’의 추억을 가진 세대에게 있어서 풀은 아련한 고향의 품을 그리게 하는 봄의 전령사가 아닐가 싶습니다.

   지금은 풀의 존재가 별로 귀하지도 않고, 쓸모 없는 천박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 농경사회였던 우리네 전통가정에서는, 농사의 밑거름이 되는 '들녘의 풀'들 자체가 필수품이고 꼭 필요한 유기농 자연 비료였습니다. 

   그런데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사회구조가 바뀌고 핵가족화되면서, 오늘 소개한 위 낱말들이 지금은 많이 들을 수 없는 낱선 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사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식문화와 농경 문화, 그리고 그 근간이 번하지 않는한, 이런 낱말들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존속할 것이며,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3월의 봄 날이지만 꽃샘 추위와 황사가 다시 봄 기운과 들녘 풀밭의 풀 향을 내밀치는 것 같습니다. 들녘의 풀 밭에 나가 봄 기운을 누려보고 싶은 3월입니다.


Posted by 초하(初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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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삘기.
    예전 어릴적에 필기라고 들었던것 같네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 제 어릴 적 부여에서는 '삐리'라고 불렀던 것 같아요.
      지역마다 사투리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ㅎㅎ

      봄 볕에 고개 내미는 풀 밭이 그리운 계절입니다.
      감사합니다!

  2. 초하님, 오랜만에 댓글 남깁니다. 잘 지내시죠?

    다른 단어들은 다 생소한데 '꼴'은 성경에서 자주 본 단어라서 익숙합니다. 뜻은 알고 있었는데 순수 우리말인 줄은 이제서야 알았네요. 소중한 우리말 배우고 갑니다. =)

    • 태현님, 정말 정말, 오랜만이십니다~~

      성경과 관련이 있는 종교인이신가 봅니다.
      그랬군요.
      고유의 한글이지요. 풀과 관련된 말들이 예쁜 말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또 아름답고 구수하네요...

  3. 풀은 잡초지만 늘상 볼수있는 거라 정감이 가는 존재네요. ^^

    • 보보님 말씀처럼, 지금은 풀의 존재가 별로 귀하지 않고, 쓸모 없는 천박한 것이 되어 버렸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 농경사회였던 우리 전통 가정에서는 풀 자체가 필수품이고 꼭 필요한 유기농 자연 비료이기도 했지요... :)

  4. 비밀댓글입니다

    • ㅎㅎㅎ 그러게요.
      저도 시골에서 자랐지만, 저희 집도 소를 키운 적은 없었기 때문에 푿소, 즉 풀소라는 말은 생소했답니다. ㅎ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핵가족화되면서, 지금은 많이 들을 수 없는 낱말들이 되어버렸지만, 사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의 농경 문화와 그 근간이 번하지 않는한, 이런 낱말들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존속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5. 김매러 간다. 그러던데 찹초 뽑는다. 뭐. 그런뜻 였군요.
    언제나 초하님의 포스팅은 정성이 가득합니다.

    • 피아랑님 말씀처럼, 저도 '김매러 간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는데, 호미로 밭을 일구는 행위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그 '김'이란 말이 '풀'인 줄은 알지 못했다가 저도 위 글을 정리하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ㅎㅎ 2-3번 블로그를 이전하고 다시 정비하게 되면서, 글 한 꼭지 한 꼭지, 다시 공개되는 1인 미디어로서 조금 더 신경쓰게 되더라구요. 독자가 읽어주는 정성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ㅎㅎㅎ

  6. 전부 우리말인데 왜이리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질까요
    봄이 빨리 와야 하는데 아직 날은 춥고 우리말도 어렵고..^^

    • 피아노님께는 조금 낯설고 어려운 낱말들이었나 봅니다. ㅎㅎㅎㅎ 아마 시골에서 살았던 경험이 없어서 그러신 듯 합니다.

      그죠... 왜 이리 봄이 멀리만 있는 듯할가요...
      꽃샘추위가 막강하니, 우리 마음도 춥기만 한 것 같습니다. :(

  7. 예쁜 말들이 마니 있네요.
    고흐의 '꽃핀 목초지' 그림은 처음 봅니다. ^^;
    요즘은 그림을 만나면 초하님 생각이 납니다.
    '아침 미술관'이라는 책을 보면서도 말이죠.
    좋은 말 소개 감사드려요~~

    • 그죠... 말씀처럼, 우리말을 찾아 소개하는 재미가 바로 이런 점이 아닐가 싶습니다. 예쁘고 아름답고 구수하고 순박한 순 우리말들을 찾는 즐거움...

      고흐의 목초지 그림, 정말 아름답지요~~
      예문당님을 위해 고흐 그림을 하나 더 찾아 보아야겠습니다. ㅎㅎ

  8. 아하! 저게 괭이밥이였군요. ^^*
    새큼한 맛은 잘 아는데, 이름을 몰랐네요.

    봄이 오나 봅니다.
    초하님, 건강 조심하세요. ^^*

    • ㅎㅎ 다담님도 어릴 적, 저 괭이밥을 드셔 보셨군요.
      저도 그 맛을 왜... 잊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이 글을 정리하면서, 그 괭이밥을 음식에 활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다담님도 건강 먼저 챙기시길 바랍니다~~

  9. 초하님 연세가 좀 있으셨군요.
    아나운서보다 우리말에 더 관심과 애정이 많으신 것 같아
    제가 좀 부끄러워지네요

    • ㅎㅎㅎㅎㅎ 빵 터졌습니다. ㅎ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에 전형적인 농촌 마을에서 자란 덕분입니다... :)

      글 쓰고, 블로그 관리를 오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맞춤법과 우리말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다 보면, 또 재미도 있구요~~
      잘하고 계시면서 뭘 그러십니까..??

  10. 봄맞이 특집- 풀과 관련된 단어들을 보니 봄이 다가왔음이 실감나네요.
    그러나 날씨는... 저녁에 눈이 내린다고 ㅎㅎㅎ
    풀과 관련된 단어들은 그 단어만 보고도 대충은 무슨 뜻인지 짐작이 될 정도로
    연관된 말들이 들어가 있는 듯 합니다. 우리말이 참 예쁘군요 ^^

    • 위에 어렵다는 분도 계시던데, 역시 린다님께는 다 아는 낱말들이었군요...
      개인적으로도 위 글을 준비하며 잊고 살았던 어릴 적 감성을 다시 찾은 느낌이 들어서 즐거웠습니다. 이런 예쁜 우리 말들은 잊어버리지 말고, 살려서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다시 써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다 안다기보단- 단어를 보며 뜻을 약간 추리할 수 있었단 뜻이었죠 ㅎㅎ

      보내주신 책 오늘 잘 받았습니다.
      초하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며 감사히 잘 읽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 ㅎㅎ 그러셨군요. 빨리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재밌는 독서되시길 바랍니다~~

  11. 병원 식단은 제 고등학교 식당보다도 더 풀밭을 내놓더군요... 정말 2주간 지겨울 정도로 각종 나물을 먹었습니다.

    • ㅎㅎ 메이아이님께서 퇴원을 하신 게로군요.
      반갑습니다!

      채소 식단이 마음에 안 드셨군요.
      하, 그 식단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인데, ㅎㅎ 병문안이라도 갔으면... :)

  12. 새록새록 하네요.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