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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며칠 동안, 화제가 되고 있는 독도한글 관련 글, 교육(청소년 발달), 성격 검사 관련 MBTI에 대해서도 글들을 정리해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오랫만에 그림 관련 소개글을 함께 나누는 것 같아 제가 더 반갑고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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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는 상황을 묘사한 그림
 

   우리도 앞에서 다양하고 많은 작품들을 함께 감상했습니다. 예술 작품 가운데에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그림들이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에 소개했던 "소나기 내리는 풍경"이나 "밀추수 풍경"처럼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절로 나오고 즐거워지게 만드는 마법같은 그림들도 있습니다.

   그런 그림들처럼, 특히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Fun Picture(재미있는 그림)" 한 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역시 바라보고 있으면, 미소가 저절로 번지는 윌리엄 파월 프리스(Frith, William Powell, 영국, 1819-1909)의 그림입니다.

   재미있는 상황을 묘사한 화가, 프리스는 영국에서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활동했던 작가입니다. 아래의 초상화와 그림, 화가에 대한 설명은 "ARC(http://www.artrenewal.org/asp/database/art.asp?aid=183)"의 영문을 참고하여 번역, 정리한 것입니다. 그의 약력을 먼저 간략하게 살펴보고, 아래 오늘의 그림을 함께 감상하려고 합니다.

                                   ▲ 쿠르츠(Don Kurtz)가 제공한 프리스의 글씨체(직접 쓴 편지)

   프리스는 1819년, 영국의 북동부에 있는 요크셔(Yorkshire) 주의 알필드 지방에서 가정 고용인이었으며, 후에 여인숙을 운영하기도 했던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슬하에 두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으며, 재능있는 아들을 열망했을 만큼 그의 인생 초기에는 무척 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왕립 미술원의 회원이었던 프리스

   영국 남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도버에 있는 성 마거릿 학교(Saint Margaret's School)에서 짧은 기간 예술훈련을 받은 뒤, 왕립 헨리 새스 미술원(Henry Sass Academy)에서 공부하였습니다. 학생시절에는 초상 그림을 그리면서 돈도 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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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르츠(Don Kurtz)가 제공한 프리스의 초상화

    프리스는 초기에는 역사적인 양식의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 뒤, 군중의 정경그림을 계속해서 그렸으나 그의 후기 작품은 구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파벌(도당, The Clique)"이라고 불렀던 그룹의 일원이 되어 작품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1845년 왕립 미술원(ARA, A Royal Academy)의 회원이 되었으며, 1854년 해변의 생명인 모레와 현대생활을 주제로 한 첫 번째 전시회를 갖습니다. 3년 뒤 전시회에서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Frith, 1819-1901)이 그의 그림을 사면서 하룻밤 사이에 성공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특히 "더비 경마의 날(Derby Day, 1858)"와 "철도역(The Railway Station, 1862)"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많은 판화작품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1875년에는 "보즈웰의 하숙방에서 저녁식사 뒤(Before Dinner in Boswell's Lodgings, 1868)"란 작품이 4,567달러에 팔렸는데, 이 때의 가격은 생존하는 작가의 작품 가격으로는 매우 높은 경매 가격이었습니다.

   1863년, 프리스는 여왕의 요구에 의해 그녀의 아들과 공주의 결혼식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화폭에 그림을 담기 위해 사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1909년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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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파월 프리스(William Powell Frith, 영국, 1819-1909), 잠자는 모델, 1853, Oil on canvas, 632×728mm, 런던, A Royal Academy ⓒ 2008 Frith



   이제 프리스의 위 작품을 함께 감상합니다. 한 화가가 모델을 의자에 앉혀놓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 있던 여자 모델이 그만 졸음을 못 이기고 잠이 들었나 봅니다. 그녀를 그리던 화가는 깨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하고 있는 난처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초상화

   "초상화"나 "인물화"는 이 그림처럼 직접모델을 보고 비슷하게 그린 그림입니다. 특히 초상화는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의 특징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인데,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특징을 그림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실존했던 위인이나 조상들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실물을 직접 볼 수 없으므로, 주로 상상에 의지해서 그리기도 합니다. 세종대왕이나 정조대왕, 이순신 장군, 신사임당 등의 영정이 바로 이러한 초상화에 해당합니다.

   한편, 살아 있는 사람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직접 보면서 그리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렇다고 모델의 생김새를 똑같이 그림으로 옮기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생김새보다 더 중요한 모델의 인상과 특징, 표정을 잡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때에도 그 사람의 생김새보다 인상이나 표정을 기억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코의 길이나 입술 길이라던지, 눈의 높이와 귀의 높이가 일치하는지 등의 자세한 생김새보다는 따뜻한 표정과 아름다운 인상이 절로 떠오릅니다.

     깨울까, 말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그림

   그런 점에서 지금 붓을 들고 앞에 서 있는 오른 쪽의 이 화가는 큰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얼굴 윤곽이나 이목구비 정도는 어느정도 정확하게 그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잠든 모델에게서 인상이나 표정과 같은 특징을 제대로 포착해내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보며 그 당시의 상황 속으로 함께 들어가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림을 계속 그리려면 물론, 화가는 깜빡 잠든 이 여인을 깨울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또 한편, 모델로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에 지쳐 저렇게 양 팔의 힘도 다 빠진 채, 꽤나 깊은 잠에 빠져있는 여인을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먼저 스칩니다.  

   마찬가지로 그림 속의 화가도 잠시 갈등 속에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화가의 옆 모습(얼굴)이나 자세로 볼 때, 그 입장은 단호해 보입니다. 그런데 옆에 서 있는 여인의 수줍은 듯, 순수한 웃음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왠지 이들 모두 깨우면 당황할 모델의 그녀를 위해 스스로 깰 때까지 기다렸을 것 같기도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저 화가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

   그런 곤란하고 난처한 상황과 등장 인물들의 그런 감정을 그림으로 남긴 프리스의 재치가 더 매력적인 그림입니다. 위 프리스의 초상화와 비교해 볼 때, 오늘의 재미있는 그림 속의 화가가 바로 프리스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초상화를 그리던 그 때의 당황스런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을지도 엿볼 수 있게 하는, 생각할수록 더욱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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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초하(初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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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독도 관련 글, 2 탄입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글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도연구회(http://user.chollian.net/~td96/index-b.html)에서 작성하여 제공한 것입니다. 그 내용을 손보고, 재정리해 올립니다.

  
독도의 역사에 대한 연대기 표를 쉽게 읽어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일목 요연하게 작성되어 있습니다. 집중하여 살펴보고 읽기에는 다소 긴 내용일 수 있으나, 모든 내용이 평소에 관심 두지 못하던 중요한 사실들이므로, 조금 어렵더라도 이 기회에 끝까지 챙겨서 알아 두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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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FRIEDRICH, Caspar David, 독일, 1774-1840) - 해안의 암초(Rocky Reef On The Sea Shore), Oil on canvas, 1824, Staatliche Kunsthalle, Karlsruhe, Germany ⓒ 2008 Friedrich (저작권 말료된 그림)


512년 :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울릉도와 독도는 우산국이라는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사부라는 군주가 이를 정복하여 신라 영토에 소속시킨다. 

1416년 :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분명히 인식하여 왜구로부터의 침략에 대한 예방책으로서 공도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1614년 : 대마도주가 죽도 탐견 길안내를 요청하였으나 조선정부는 이를 거절한다.

1618년 : 도꾸가와 막부는 조선 정부 몰래 일본의 두가문에 죽도(울릉도) 도해 면허(이는 외국과의 통상을 허가한다는 정부의 허가서이다. 이는 일본정부역시 독도,울릉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증명하여준다.)를 발급한다.

1693년(17세기) : 안용복 사건. 동래의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 근해에서 왜인을 발견하여 퇴거시킨다. 그 후 안용복이 은기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관백의 울릉도 출어금지 공한을 받는다. 그리고 울릉도의 일본 어민을 소환시킨다. 안용복의 민간활동으로,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시킨다.

1696년 : 안용복의 제 2차 일본 활동. 안용복은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라는 깃발을 사용하여 일본에 관직을 자칭하고, 2차 도일을 시도하였다. 안용복은 오끼도를 거쳐 오기슈 연안에 도착하여 호끼슈 태수로부터 "양도에 침범치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1881년 : 이때부터 독도의 명칭이 나타난다. 울릉도 개척령을 발표하여 척민정책을 취한다. 일본 어민의 울릉도 침입에 관해 조선정부가 일본정부에 엄중 항의한다.

1900년 10월 : 칙령 제 41호에 울릉군의 관할구역으로서 독도를 정하였다.

1904년 : 울릉도 호수는 400호에 달하였고 여름철에는 수십명의 어민이 독도 부근에 출어한다. 섬 위에 작은 집을 만들고 매회 약 10일간 기거한다.
 
1905년 : 일본 각의에서 독도의 일본령 편입을 결의했다. 내무 대신으로부터 시마네현 지사에 훈령(시마네현 소속)을 한다.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의 동현 편입을 발표한다.

   시마네현 송영지사 일행이 독도 현지 조사를 실시한 후, 일본정부는 독도를 죽도라 명명한다. 즉, 그들은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불법적으로 독도를 죽도라는 이름으로 명명한다. 이로써 그러한 편입 사실을 공식적으로 공고한 것이 아니라,  일개 현에서만 암암리에 편입 사실을 발표한 것이다.

   8월 19일에는, 러일 전쟁 이용 목적으로 독도에 망루를 설치한다. 러일전쟁 승리 후인 10월 24일 망루를 철거하였다.

1906년 : 독도의 명칭을 문헌상으로는 처음으로 쓴다. 광무 10년 3월 5일, 울릉도 군수 심흥택의 보고서, '매천야록'에 독도와 관련된 기사가 있다. 은기도 가동문보가 울릉도에 건너가 도근현에 편입된 초지를 울릉군수 심흥택에게 통고하고,  다음날 심흥택은 정부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1910년 : '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죽도를 한국령으로 표시한다.

1946년 1월 19일 : SCAPIN 제 677조(연합군 최고 사령관이 항복문서의 시행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로서 일본의 영토권에 대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문서임)에서는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통치권에서 제외한다.

1948년 6월 30일 : 미군 공군의 폭격연습 중 독도에서 출어중이던 어민 300여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우리 정부의 항의에 따라 1953년 2월 27일자로 독도를 미공군 연습기지로부터 제외시킨다. 그 뒤 1951년 6월, '독도조난 어민 위령비'가 세워진다.

1952년 1월 18일 : 우리는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선언'으로서 독도를 포함하여 '평화선언'을 선포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남도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로 한다.

1952년 1월 28일 : 일본은 평화선언이 국제법의 원칙에 위반된다며 항의한다. 더불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

1953년 : 일본인이 독도에 상륙해서 조난어민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의 영유표식을 한다. 일본인은 한국 어민의 독도근 해 조업에 항의한다. 정부는 즉시 항의 각서를 보내고, "해양 경비대"의 파견을 결의한다.

1953년 7월 : 국회는 독도를 일본의 침공으로부터 보전할 것을 결의하고 경비대를 상주하도록 한다.

1953년 : 독도의용 수비대를 창설한다. 독도수비대의 시초는, 1953년, 3대에 걸쳐 울릉도에 살면서, 독도에서 생활을 해오던 홍순칠씨를 대장으로 한, 민간인 의용단체였다. 이 민간인 '독도사수 특수의용대'가 처음에는 독도 수비를 담당하였다.

   그 뒤부터는 울릉경찰서 소속의 경찰들이 정식으로 맡게 된다.(활동기간 : 1953. 4. 20. - 1956. 12. 25)

1954년 4월 27일 : 등대를 설치한다.  같은해,  8월1일 정오부터 점화를 개시하였으며,  동시에 세계 각국 항만에 통보한다. 이에 일본측은 영해침범이라 항의한다.

1954년 :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문제를 제소할 것'을 제의한다. 그러나, 한국은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실효적으로 한국의 영토이므로, 재판소에 제소할 필요가 없다며, 이를 거부한다.

1955년 : 독도에 새로운 등대 설치하였고 각국에 통고한다. 이 때 역시, 한국의 등대 설치에 항의한 일본은 등대설치 통고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은 등대, 시설물 등 독도에 대한 설치의 합법성을 재천명한다.

1965년 3월 : 최종덕씨가 울릉도 주민으로서, 도동 어촌계 1종 공동어장 수산물 채취를 위해 독도에 들어가 거주하며 어로활동을 시작한다.

1965년 : 한일 어업협정이 체결된다.

1969년 : 일본 순시선이 독도 주변을 돈다. 이에 한국은 일본측에 대해 영해 침범이라며 항의한다.

1973년 : 일본은 한국의 독도개발 계획에 항의한다.

1977년 6월 25일 : 일본 영해법 제정시, 후꾸다 수상은 "일본의 영해를 12해리로 설정시 독도(다케시마)는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전제 아래 시설물을 설치하겠다"는 망언을 한다.

1981년 10월 : 독도에서 어로활동을 하던 최종덕씨가 주소지를 독도로 옮긴다. 이로써 주민등록을 등재한다.

1983년 3월 22일 : 일본 정부가, 독도는 일본 영유권이라는 공식 견해를 발표한다. 같은 해,  8월 18일, 일본 미야케 외무성 정보문화국장이 '한국 민간인이 독도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엄중 항의한다'는 망발을 한다.

1986년 9월 10일 : 쿠라니리 외상이 "독도(다케시마)는 일본의 영토이다"라는 망언을 일삼는다.

1986년 7월 : 최종덕씨의 사위 조준기씨 부부가  울릉도 주민으로서 독도에 주민등록을 전입 신고한다.

1989년 : 외무성 도고 국장이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주장을 한다. 일본 아사히 신문에 '독도불법점거를 묵인하지 말자'는 제목의 어이없는 독자 투고가 실린다.

1991년 1월 22일 : 일본 해상 순시선이 독도로부터 1.5km 떨어진 해상까지 침범한다.

1995년 : 일본 문부성이 초등학교 검인정 교과서에 한일간의 국경선을 독도와 울릉도 중간에 긋도록 지침을 전달한다.

1996년 : 일본 수상, 하시모토가 공식 석상에서 '독도를 일본의 배타적 수역 안에 포함시키겠다'고 또다시 망언을 한다. 이에 한국의 여러 시민단체들이 일본의 발언에 격분하여 시위를 벌인다

1997년 : 울릉도에 '독도박물관'을 완공한다.

1998년 : 독도 접안시설이 완공되고, 30평 규모의 3층짜리 어민 숙소가 지어진다. 독도에 집을 짓고 접안시설을 만들어 살고 있었던 김성도씨의 집과 접안시설을 없애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어민숙소에  배를 정박할 만한 접안시설이 준비되지 않은 터라, 김성도씨는 독도에 들어갈 수 가 없다. 그리고 같은해 11월에, 준공식을 한 접안시설은 사실상 해경들의 선박을 위한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안일하고 구체적이지 못한 태도가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1998년 9월 25일 : "한일 어업협정"을 타결하였다. 그러나 신 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를 한국과 일본과의 중간수역에 포함시키는 졸속한 협정을 만들어 버린다.

1999년 1월 :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분쟁을 우려하여, 국회의원들의 독도방문에 따른 취재기자의 수행을 방해한 사실이 밝혀진다. 이 기자들의 취재가 이뤄질 경우, 독도내 접안시설, 유인대 등이 보도될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문제제기 가능성으로 외교 문제화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소극적이고 굴욕적인 정부의 태도가, 바로 독도를 한국과 일본과의 중간수역에 포함시켜버린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한국 정부가 얼마나 더 소극적일지, 어떤 입장과 태도를 보여줄 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2000년 1월 1일 : 일본의 독도침탈에 대한 야욕과 우리 정부의 안일한 독도정책을 비난하고, 이 번 신 한일어업협정의 무효화를 선언하기 위하여, 독도에 들어가려 했던 민간인의 독도 입도를 정부가 막아버린다.

2000년 4월 8일 : 4월 8일 이후로, 경북 울릉군은 울릉군 조례 제1395호 '울릉군 리(里)의 명칭과 구역에 관한 조례 중, 개정조례’ 를 공포한다. 그동안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42∼산 76번지를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산 37번지로 변경한다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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